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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임지의 첫 담임반을 떠올리다.



어찌어찌 하여 쉬게 되는 날 ; 내일(아니 이제 오늘이구나..)
늦잠 잘 수 있다는 느긋함으로 마음 푹놓고 한밤에 앨범을 뒤적이며 19년 전을 더듬어 간다.

군에서 전역한지 한 달도 못되어 짧은 머리를 하고서 처음 만난 백운 아이들은 중2년생였음에도 내게는 초등학생처럼 귀엽기 그지없는 꼬마들 같았다. '민간인 그림자'만 봐도 환장을 하는 전방생활을 마치고 곧 바로 만나게 된 그 아이들은 언제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내 속으로 파고 들어왔고, 그들 그림자 하나라도 놓칠세라 첫 달에 거금(한 달 월급 보다 커서 할부로 해야 하는)을 들여 카메라 FM2를 샀다. 동네에 필름현상소가 있을리 없으니 열심히 눌러 댄 셔터를 사흘은 지나야 확인할 수 있던 시절, 사진을 보며 사흘 전, 일주일 전, 밀릴 때는 한 달 전 추억을 끄집어 내어보는 즐거움이 기나 긴 시골밤의 소일거리였다.
나나 아이들이나 학교생활이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교사와 학생 간'의 소통은 되었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초보교사인 나와 선택의 여지 없이 '스승콩깍지' 씌움을 당해야 하는 불공정거래를 했던 셈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보교사는 그나마 정이라도 한가닥 갖고 있어서 눈속임이 가능했다.
행복한 그 해가 정신없이 가고 이듬해 2월, 학년 마지막 날 마지막 종례 때, 아이들은 의례히 그러는 것처럼 교탁에 포장된 물건 하나를 놓아 주었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물건, 빈 앨범이다(당시에는 앨범이 선물의 대세였다). 갑자기 섭섭함이 왈칵 솟는다. '이놈의시키들, 마지막이니 이별편지라도 하나 써서 주면 좀 좋아? 분위기라고는 코빼기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어찌됐든 겨우 진정하고 품위있게 마지막 종례를 마치고, 퇴근해서 포장을 뜯었다.
아, 이런...!!
새 앨범인 줄 알았는데,, 새 앨범 맞기는 한데.. 그 안에 카드며, 편지, 사진들이 마흔 명도 넘는 그놈들 숫자 만큼 고스란히 모아져 있는 거다.
'이놈시키들, 교실에서 뜯어보라고 좀 하지... 교무실에서라도 뜯어볼 것을.... 이놈의시키들, 바보같은시키들, 이놈의.. 시키들... '







그렇게 그렇게 3년을 마치고 동향으로 옮겨 갔다.
여전히 어설픈 초보가 또 그렇게 이쁜 아이들과 3년을 훌쩍 보내버렸다.






이젠 전주에서 더 큰 아이들과 함께 한다.
세월도 흐르고 세상도 흘렀으니 나 역시도 어디론가 흘러왔을 터, 그것이 저 옛날 그 옛적 보다 더 '원숙한 교사됨'을 나타내는 것이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하지만 '훌륭한 스승'은 고사하고 '원숙한 교사됨' 마저도 내겐 오리무중이다. 첫 담임 초보 때에 비해 하나를 얻고 다른 하나는 잃었다. 그래서 아직 여전히 초보인 거다. 어쩌면 얻은 하나 보다 잃은 하나가 더 큰 것일지 모른다는 안타까움!
전주의 더 큰 아이들은 마지막 교복학년을 반 년 겨우 넘게 남겨두고 졸업앨범용 사진을 찍고 있다. 아이들은 이 사진이 기념품이 되는 순간부터는 교복으로부터 해방되며 '꿈꾸던 자유'와 '갈망하던 성인'을 손에 쥐겠지. 그리고 곧 알게 될 것이다, 울타리만 바뀔 뿐 세상의 구속은 여전하다는 것을, 또 그리고 결국 구속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쨌거나 뭐든 '마지막'이라는 설정은 여타의 상황이 풍기지 못하는 아쉬움을 뿜는다.(그 '마지막'이 당장이 아니고 먼 아홉 달 뒤의 일이라 할지라도)  다가올 것이 분명한 이별을 미리 준비하고 영원(?)한 서로의 끄나풀과 흔적을 열심히 만들어 둔다. 교복학년의 마지막인 고3의 졸업은 다른 어느 졸업 보다 더 벅찬(좋든 싫든) 전환이기에 열심히 열심히 기념해도 아깝지 않다. 이렇게 서고 저렇게 서고, 바꿔 서고 앉아도 보고, 찍기 전 다시 한번 거울도 또 보고...!  내반 네반이 없다, 내반이 아니어도 네반의 단체사진을 내 카메라에 담는다.






스무 해 가까운 시간을 흘러 오면서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얻은 건 뭐고 잃은 그것은 무엇일까... 그때 꾸었던 꿈들은 아직도 여전히 꿈인 채로 남았는가... 아니, 아직 유효할까...
12월, 2월이 그냥 가고 또 3월이 덤덤히 오는 것은, 이렇게 한해가 지나갈 것임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시작할 때의 흔적들을 죄다 쏟아놓고 하나씩 하나씩 추억하고 있다.
그때 그 아이들과 함께 했던 마음, 지금은 퇴색되어 윤곽을 따라 그릴 수 없는 초심의 자국을 찾아 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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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5 01:45 2009/05/15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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