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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실, 그리고 할머니 생각




가끔 바느질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게 바느질은 가공이나 제작의 의미가 아니라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편의를 위한 노작이어서
재봉틀질이면 더 좋을 것도 그냥 실 바늘로 한 땀씩 꿰맨다. 재봉틀이 없기도 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로 쓰는 검정실 실패는 23년 하고도 넉 달이 더 된 것으로,
그동안 많이 홀쭉해져 실패심 목과 발이 휑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식구가 늘지 않는 한 앞으로 4, 5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듯하다.



초임지인 백운에 가던 90년 2월 말일,
당시 90세를 막 넘긴 할머니가, 손주가 첫발령지에서 자취를 시작해야 하면 꼭 필요한 게 요거다 하면서
전날 저녁에 할머니 무릎에 검정 나이롱 실타래를 두르고 풀어서 감아준 그 실패다.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탓에 나한테 '할머니'는 외할머니다. 104세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전에 가끔
내 나이 든 만큼의 존댓말을 쓰기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할머니한테 만큼은 말높임 표현이 불편하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실패에서 검정실을 풀어 쓰면서 홀쭉해진 실패몸을 알아차리고는 바느질을 멈추고
찬찬히 뜯어보게 된다.
초등학교 다니던 동생들 공책의 뒷장을 뜯어 쓴 건지 실패심에 원고지 모양의 붉은 칸이 보인다.
아마 초등 저학년의 국어공책인 듯.
실패심의 귀에 가위로 흠을 내어 앞서 잘라쓰고 남은 실 끝을 끼워 놓게 하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발령지에 내려가서 첫 바느질이 쉬우라고 길게 실을 꿴 바늘을 실패에 꽂아주던 것도 기억난다.
스물일곱 손주가 편하라고 아흔 둘에 바늘 귀에 실을 꿰다니,,,
바늘이 크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참 정정하셨다.
그 바늘은 스무 해의 손가락 힘을 못당하여 이리저리 휘고 귀가 젖혀졌지만, 여전히 내곁에 살아 남았다.


발령나던 해부터 지금까지 쬐그만 간이액자에 담겨 항상 함께 하는 할머니. 초봉보다 더 비쌌던 FM2 구입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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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11:18 2013/07/0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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