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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때때로 제자들을 만나면...



시간을 내서 누굴 만난다는 건
그 시간만큼은 다른 걸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에 대한 배려일 수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많이 보고싶었던 사람일 수록
배려는 깊어지겠지요.
나는 우리 36클럽 멤버들이 많이 보고싶습니다.
다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긴 하지만
각자의 생활이 달라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모여보자고 조를 수 없으므로
그저 우연히라도 마주치길 바랄뿐이지요.
그런데 가끔 36 멤버 중 몇몇 사람들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무척이도 반가운 마음에 선뜻 시간을 내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눈 앞에 나타날 모습을 기다리곤 한답니다.

모처럼 몇명이 모이면 나도 36멤버로 돌아가서
반년이 지나간 그동안의 얘기를 맘껏 쏟아놓습니다.

직업이 교사인지라 불쑥불쑥 나를 찾는, 그리고 내게 시간을 구하는
그룹이 많이 있습니다.
- 어떤 그룹은 "얘들이 그동안 나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을 만큼
밤을 세워 보따리를 끌러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꼭 내 가족같습니다.
그들과 함께일 땐 나 역시도 끝없이 기쁨에 벅차고 또한 고맙지요.
- 어떤 그룹은 이제 다 커서 오히려 친구나 선배같이 나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룹 앞에서는 내 혀가 꼬여도 부끄럽지 않으므로
코가 비뚤어지게 소주를 들이마시기도 합니다.
- 또 다른 그룹은 자기들 끼리의 구성원이 만들어질 때면 내게 연락을 합니다.
구성원이 빈약하면 나를 찾지도 않지요.
마치 그 구성원 중 하나라도 빠지면 내게 혼이라도 난다는 듯이 말이죠.
그 그룹은, 모처럼 구성원이 다 차서 나와 만날 때면 자기들끼리도 무척 오랜만인 것처럼
서로 오락거리를 찾느라 시간을 다 보내지요.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내가 무척이나 보고싶어 하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내 앞에 나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낍니다.
그저 나는 그들이 놀고 갈 자리를 빌려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이지요.
그들이 모처럼 부모 곁의 잠자리를 떠나 아무 간섭없는 공간에서 자유롭게
밤 새워 쉬는 것도 제법 가치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유롭고자 할 때 내가 그들의 핑계거리가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에
그들을 보내고 나면 씁쓸해집니다.

어젯밤 연락이 왔습니다, 토요일(..그러니까.. 오늘이지요)에 애들이랑 찾아가도
되겠냐고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물론, 기다리겠다고 했지요.
해서.. 주말에 있을 다른 약속들을 모두 묻어두고서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밤 열시쯤에 만나도 되겠냐는... .
그룹의 몇명의 일정 상 그 시간에나 모두 모일 것 같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그들은 보고싶을 때 보고싶은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놀기 좋은 구성원을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나 봅니다.
하여튼 이번 대답은 "안된다"였습니다.
그 시간에 만나서야 감질만 날 뿐이지요.
자기들 끼리 모여앉아 부모 눈치보지 않고 밤을 세워보고픈 게지요.
맨 마지막 다시 걸려온 전화는... 각자의 사정이 맞지않아 못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요...
나를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들 끼리 모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들 각자의
사정이 달라 모일 수 없으니 응당 내게 오는 것 역시도 무산되는 거지요.
결국 그렇게 해서 나는 주말에 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 사정을 그들이 알까요...? 알면서 그럴 수 있을까요...?

이쯤에서 예전 내가 학생이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문득 떠올라도 몇번이고 망설였다가 급기야 연락이 되면 약속날 며칠 전부터 설레이며
그날 앞뒤를 온전히 비워두고 기다리던 선생님과의 만남.
모처럼 뵙는 선생님의 한 마디 위로를 그 해가 다가도록 가슴에 새기고는 뿌듯해 하던...

지금, 나는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건가요...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지 못해 실패한 담임인가요...?
아이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한 통화에 주말을 멍청히 뺏겨버린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고싶은 것은... 일종의 "구걸"같은 것인가요..?

오늘, 그 아이들 덕분에,
그동안 간과했던 몇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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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4 22:22 2002/08/24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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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4 22:22에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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