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트의 포켓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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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벽지를 붙인 술집에서 K군을 떠올리다.






"얌마, 이 시간에 어디가? 이 비 다 맞고..? "

12시 10분.. 그니까 오늘이 아니라 이미 내일, 또 하나의 오늘이다.
이금희의 파워인터뷰 '최진실'편을 보고는 한잔 생각이 나
차를 몰고 교문을 막 빠져 나오면서 K군을 봤다.
항상 이맘 때쯤 한잔 생각을 떠올리는 건.. 익숙한 그 어느 것과도
부딪히지 않을 낯선 곳에서의 독야청청을 꾀함인데
비오는 한밤중에 뜻밖으로 낯익은 K군을 만나는 또 하나의 생경함.

"ㅇㅇㅇ에 가려구요.."
"이 비 속에? 이 시간에?.."
"아니요.. 저기.. 맞을 만 한 것 같아서요..."
"암튼, 일단 타봐! "

고놈.. 뒷문 열고 들어온다. 술 냄새...

"거기가 어딘데? "
"ㅇㅇㅇ이요.."

"한잔 했냐? "
"예"
"너네는 주로 어디서 마시냐? " (질문이 이상한데, 아직 고3이니까..)
"스모프치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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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를 처음 본 건 그애 중3 때
담임하다 만 우리반 옆반.
K는 언제나 내게 우물쭈물이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표정은 만감을 품어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명료했다. 지금도 그런다.
고3인 지금 오며가며 스쳐 인사할 때도, 야자 끝내고 갈 때도
인사말은 항상 분명했다.
그런 K가 말수를 감추고 말꼬리를 흐리는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가 중3 때, 난 이미 담임을 내놓고 멀찌감치 있을 때,
자기 반 몇몇 애들에 섞여 도매금으로 담임한테 혼나던 날
담임의 심문이 억울했던지 붉혀진 얼굴로 눈물만 글썽거리던..
밖에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글썽이던 눈물이 뚝뚝.
그 후로 단 한 번도 K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2천 원 더 비싸서인지 사람이 별로 꾀지 않는
'황토탕'에 주로 가다가 가끔
멀리 챙겨 나가기 귀찮을 때면 들르는 인월 '지리산탕'에서
종종 K를 만났다..가 아니라 두 번 봤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키. 반갑다.

"몸무게 몇 나가든?"
"60요"
"엥..? 나 정도도 63인데, 니가..?"

무심히 지나온 3년 동안 클대로 큰 K의 몸을 훑어 보니
옆으로 보나 위로 보나 나보다 덜할 것 같지 않은 몸이다.

"살 좀 찌려고 많이씩 먹는데도 그래요 ㅎㅎ"

그렇다. 큰아들인 K가 살이 찌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언제나 명료한 말투에 늘 웃는 낯이어도,
속으로는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여도, 큰아들은 그렇다.
그냥 막연히, 살이 찔 수 없는 섬세함을 눈치 밑에 깔고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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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ㅇㅇㅇ에는 왜 가냐?"
"ㅇㅇ이가 끝판에 없어졌는데, 집에 들어갔나 보려구요"
"없어졌으면 그만이지 임마.. 그걸 왜.."
"아녜요, 확인해봐야 돼요. 데려다 주고 가야 돼요.."
"내가 보기엔 너도 상당히 취했는데?"
"그래도 ㅇㅇ이 집에 데려다 놓고 가야 돼요"
"그대로 집에 가면 안혼나냐..?"
"엄마한테 얘기했어요, 술먹고 온다고.."
"그래?.." "우리.. 수능 끝나면 쏘주 한 잔 해야지..?"
"그래야죠.., 꼭"

그 흔한 휴대전화도 없는 놈, 이쁜 놈..
그런 K가 참 좋다.


어쨌거나, 그건 그렇고..



600여 년 전의 기호.. 이 조형과 정형에 전율이 온다.
술집 벽지로 손색없이 붙어 있는 훈민정음 무늬를 무심코 훑다가
찌릿하게 전기오는 우리글.
콜롬버스 달걀식의 발상의 전환으로는 어림도 없을 무거운 애정의 짐, 창조.
비록 그것이 수집, 조합이거나 발췌이거나 재구성이라 해도
잠깐 눈 박은 틈에 느끼는 전율이 있다.
새삼스럽기도 하지..
그 숱한 국어시간을 지내놓고 이제사 감동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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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5 21:39 2005/11/15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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