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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옛날의 상사꽃이여!



오디오CD를 하나 구하면 꼭 따라 붙는 설레임이 있는데
돌아보면 그 설레임은 사실은 불안감이었다.
한 곡 보고 사는 이 앨범이 과연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돈이 아까울 것인지... 하는 초조함.
그래서 결국 갖고 있는 CD의 반의 반 정도는 푸대접을 받는다.

어떤 때는 그 설레임의 극치를 느낀 적도 있는데,
고2때, 국내 발매가 되기전 그토록 해적판을 찾아다니던 QuietRiot와
93년, 석달만에 구한 슈베르트의 Messe No.2 G-dur, Stabat Mater처럼
점 찍어 둔 앨범을 못구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찾다가
끝내는 두어 달이 넘게 기약없는 주문을 해놓고서
막상 받아들면 스며오는, 개봉 전 불안감.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공했다 싶을 때엔 갑절의 기쁨이 되어
"천하를 얻으면 이럴까..." 싶어진다.

갖는 기쁨.
안달을 하다가 겨우 내것이 된 것들에 대한 기쁨,
벼르고 별러 꽉찬 준비 끝에 갖게 되는 기쁨... .
그것들이 현란하게 떠벌이고픈 벅찬 감정이라면,
때때로 우연히 그저 지나치듯 내것이 되어
잊어질듯 가녀리게 속으로 품어오는 기쁨은
홀로되어 말없이 피식거리며 떠올릴 잔잔한 소중함이다.

내가 오래도록 품어온 작은 기쁨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선암사.
수년 전 언젠가 그곳에서 1박 하면서 나물에 물 말아 절밥 먹은 것하며
문이 없고 앉은 눈높이가 터진 변소.
무엇보다 내가 오래도록 눈에서 지우지 못한 건 그곳의
바랠대로 바랜 단청이었다. 색이 다 빠져 말 그대로 고색창연한.
그럼에도 다시 선암사를 찾지 않는 것은 혹시나 단청을 다시 칠했을까봐.

그 선암사에 오르던 길 중에 얼핏 보인 처음 본 붉은 꽃에
시간이 말릴 때까지 넋을 빼앗겼었다.
시뻘겋게 갈기갈기 찢어져 긴 대롱 위에 잎도 없이 핀 채
큰 나무 그늘 풀섶에 가려져 언뜻 보이던 그 꽃이 무엇인지는
그로부터 또 수년이 지난 뒤 한영애의 노래를 들으며 찾아
알게 되었는데, 꽃무릇의 일종인 "상사화" 꽃무릇인 석산이었다.
그때 뒤로 그 꽃 그리움에 한 뜸 들이다가 요즘, 선운사에 대한
매스컴의 홍보를 듣고서 다시 보고싶어졌다.
토요일에 차를 급히 몰아 선운사 입구의 그, 상사화 꽃무릇 군락지라는
곳에 들렀다. 자영 서생 군락지라는 말이 무색치 않았다.
그런데,
너무 널부러졌음인가... 빨간 감동은 감동이었으되
전주에서 내쳐간 설레임의 보답은 못되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눈 돌려도 손에 잡히는 많은 꽃송이는
많은 만큼 기쁨을 주는 게 아니었다. 그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지나치다 언뜻 보였던, 이름조차 몰랐던 조계산 선암사 기슭의
그 붉은 상사화 꽃무릇은 생각지 못한 한켠에 홀로 있어서 더욱
시뻘건 자극의 감동으로 다가왔을 게다.

이제 잘 시간이 되어 주말일을 생각하다가
새삼 "갖는 기쁨"을 되새기는 이 밤.



덧붙임 (2008. 9. 28) : 상사화와 꽃무릇(석산)

상사화(상사꽃)와 꽃무릇(석산)은 둘 다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점은 같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상사화는 꽃이 크고 연분홍빛(연노랑이나 진노랑빛도 있다)이며 초봄에 잎이 먼저 난 뒤 꽃은 7~8월에 피고, 꽃무릇은 꽃이 상사화보다는 작고 붉은 주홍빛이며 9~-10월에 꽃이 먼저 피고 잎은 10~11월 늦가을에 돋아난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서로 닮은 탓에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 (석산을 '붉은 상사화'라 하기도 한단다.)
꽃말은 둘 다 "이별"이다.

상사화와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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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4 00:38 2001/09/2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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